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다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말은 피해자의 행동을 전형적 피해자상에 끼워 맞추어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피해자의 행동을 증거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피해자의 사건 전후 행동 역시 다른 정황증거와 마찬가지로 범행의 존재와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피고인은 여러 휴대전화 판매점을 운영하는 대표였고, 피해자는 그중 한 매장에서 근무하던 수습 직원이었다. 회식 후 직원들은 피고인의 집으로 함께 이동해 술을 마셨고 피고인은 새벽 4시경 피해자의 옷을 벗긴 후 성행위를 하였다. 피해자가“대표님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라고 말했지만 피고인은 괜찮다며 양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린 상태에서 성기를 삽입하였다.
1심은 위력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피해자가 주장한 유형력은 양손을 잡아 올린 정도였고, 1~2시간의 성행위가 지속되는 동안 추가적인 폭행이나 협박은 없었다. 피해자가 성관계 중 다른 직원을 불러달라고 말하거나 동료 여직원의 외모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점, 성관계 후 회사 이야기를 나누며 피고인 옆에서 잠든 점도 고려되었다.
사건 이후의 행동은 더욱 문제였다. 피해자는 다음 날 평소처럼 근무했고 피고인과 단둘이 차를 타기도 했다. 일주일 후에는 직원들과의 회식에서 피고인을 “오빠”라고 부르고 얼굴을 만졌으며, 성관계 당시 피고인이 약속했다면서 신발을 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이를 목격한 직원들의 진술도 있었다. 이후 피해자는 남자친구와 다투던 중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았고, 다음 날 고소하였다.
결국 1심은 위력에 의한 간음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의정부지방법원 2023. 9. 13. 선고 2022고합268 판결) 이는 단순히‘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신빙성을 배척한 것이 아니었다. 핵심은 당시 피해자의 실제 행동이 과연 위력에 의해 자유로운 의사가 제압되었다는 진술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있었다. 특히 피고인이 대표자라 하더라도 실제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성관계 도중 피해자가 왜 적극적으로 다른 직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는지, 왜 사건 직후부터 상당 기간 피고인과 친밀하게 행동했는지 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이 남는다고 판단하였다.
반면 2심(서울고등법원 2024. 3. 29. 선고 2023노2917 판결)은 피해자의 모순된 행동에 대하여 “그럴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증명력을 배제하였다. 사건 다음 날 피고인과 함께 이동한 것은 두려움 때문에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일 수 있고, 일주일 후 친밀하게 행동한 것은 심리적 미숙함 때문일 수 있으며, 성관계 중 다른 직원을 찾은 것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행동일 수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그러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로 그런 이유로 행동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피해자가 사건 후 가해자와 함께 이동할 수도 있다. 친밀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 늦게 신고할 수도 있다. 모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행동이 그런 이유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피해자가 그러한 이유 때문에 행동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2심 판결의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정황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대안적 설명을 제시하면서 그 정황이 갖는 증거가치를 약화시켰다는 데 있다. 피해자에게 유리한 정황은 피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적극 평가하면서, 피해자에게 불리한 정황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증명력을 제거한다면 증거평가의 비대칭성이 발생한다.
더 나아가 재판부가 피해자 진술과 객관적 정황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설명을 스스로 만들어 주기 시작한다면, 재판부의 역할에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변호사가 아니며, 피해자의 진술을 방어하고 보완하는 주체가 아니라, 제출된 증거를 유·불리의 구별 없이 평가하여 검사가 공소사실을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했는지를 판단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전형적인 피해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을 배척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 행동이 갖는 증거법적 의미까지 제거할 수는 없다. 피해자의 행동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어느 것이 맞는지 합리적 의심 없이 확정할 수 없다면 그 불확실성은 피고인의 부담이 아니라 검사의 부담이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않는 것과 피해자의 비전형적 행동을 해명해 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전자는 편견의 배제이지만, 후자는 자칫 증명책임의 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형사재판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피해자의 비전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아니라, 이를 포함한 전체 증거를 보더라도 피고인의 유죄에 합리적 의심이 남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출처 : 핀포인트뉴스(https://www.pinpoin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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